인터뷰 기사
자기만의 음악’을 들고서 한국에 재도착하는 중 (글:하리타)
출처: 미디어일다 ildaro.com
공연_이방인의 일기장 관람평 Written from a lovely audience.
진유영은 이 공연에서 이방인으로서 독일에서 지냈던 경험들을 풀어놓는다. 공연 제목은 '이방인의 일기장'. 일기장은 그 자체로 가장 내밀한 언어이자, 기억을 담는 도구다. 과거의 자신이 그 시점의 언어로 박제해둔 기억이다. 공연은 연주자 진유영의 일기장이지만, 퍼포먼스는 그 장르 특성상 현재 풀어지는 순간의 공연이 관객들의 사고와 부딪히고, 관객들의 기억을 현재로 끌어올려 끊임없이 ‘되어가는’ 과정을 거친다. 관객 자신의 기억들을 마주하게 되는 2시간의 공연은 그 마무리에 프로그램북 마지막 페이지에 관객 자신의 일기를 채워넣는 과정을 통해 갈무리된다. 관객은 공연을 통해 연주자의 일기장을 보았지만, 그 자신의 일기장을 꺼내보고, 직접 마지막 페이지를 채움으로써 공연을 자신의 일기장으로 남기게 된다.
이 일기장은 ‘이방인’의 일기장이다. 이방인은 일차적으로 독일에서 외국인 여성으로 살아온 진유영을 일컫는 단어이지만, 일기장이 단순히 ‘진유영’의 일기장이 아닌 ‘관객 자신’의 일기장이 됨으로써 이방인은 관객을 지칭하는 의미 또한 포함하게 된다. 현재의 자신은 기억 속 자신과 같지 않다. 기억을 반추하고, 재구성하고, 공연하는 현재의 그는 과거 독일에서의 기억과 다른 존재다. 현재의 자신은 기억 속 자신에게 낯선 이방인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에게 이방인이 되어 과거의 자신을 더듬게 된다. 연주자는 관객들이 과거의 자신을 더듬는 시선을 안내한다.
1부. 진유영의 내면, 생명의 몸부림
1부는 연주자 진유영 자신의 이야기에 초점을 둔다. 첫번째 곡, 뛰는 자를 위한 시에서 그는 독일에서 보낸 7년, 고되었던 시기를 떠올리며 감정을 싣는다. 페이드 인과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강렬한 울부짖음과 쿵쾅거리는 소리는 관객의 이목을 단숨에 집중시킨다. 그 강렬한 시작에 관객은 연주자의 일기장으로 빠져든다.
울부짖는 인트로를 지나 마주하는 다음 감정은 '사랑'. 전혀 가볍지 않은 구성이나, 연주자는 지나친 자기연민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의 지난 일기장이 질척한 연애담이어서 차마 그대로 읽을 수 없었다며 웃음을 자아내는 멘트와는 달리, 하나의 악기와 절제된 움직임으로 구성된 이 담백한 러브레터는 산뜻하기까지 하다.
이어지는 곡에서 그는 표정과 몸짓으로 붉은색 풍선에 수많은 언어와 감정을 담아낸다. 절절한 안타까움, 애정, 존재에 대한 미움. 이 모든 것이 팔레트 위 물감처럼 전시되고 한데 뒤섞인다. 연주자의 중심에 위치하던 풍선은, 강렬한 감정의 에너지를 품고 들어올려진다. 온갖 애증이 뒤섞인 통렬한 생명 에너지. 분위기가 최고조에 이르렀을 때 진유영은 단숨에 칼을 들어올린다. 온갖 삶의 감정이 뒤얽힌 공간은 그 순간 찢어진다. 풍선 소리를 가르는 적막. 칼의 번뜩임. 뜨겁게 맥동하는 생명을 찌를 듯이 칼은 붉은 풍선에 가까워진다. 칼날이 얇게 팽창된 풍선에 마찰되기 직전의 순간, 마침내, 그는 칼자루를 거두고 환하게 웃는다. 안도의 한숨과 박수가 공간을 채운다. 꽉 쥐어졌던 심장이 풀려나듯이, 관객은 지금 현재에 연주자와 그 자신이 살아있음을 뜨거운 안도와 함께 실감한다.
1부의 끝곡 제목이 '제 2막'이라는 것은 진유영식의 위트로 보인다. 온갖 감정의 에너지가 휘몰아쳤던 1부의 끝은, 그의 설명대로, 인생의 2막으로 넘어서기 위해 한 부를 정리하며 작곡한 곡이다. 버려진 물건들과 녹음되어 재구성된 연주자의 목소리로 끌어가는 곡 분위기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방인이라는 단어와 버려진 물건들에서 진득히 묻어나는 외로움의 냄새. 살고싶었나봐, 살고싶은가봐, 나는. 단어들의 조합은 스산함을 고조시킨다. 목소리는 쓰레기들이 품은 시간의 흔적과 바람소리를 한껏 드러낸다. 꺽꺽대는 소리. 살고싶었나봐. 목졸리는 소리. 널부러진 오브제 중 한 몫을 차지하는 밧줄. 곡 전반적인 분위기는 비집고 나오는 숨소리만큼이나 절실하고, 또 비장하지만, 이 목소리를 배경삼아 물건들을 마찰시켜 소리를 내는 진유영의 얼굴엔 다른 곡들과 달리 시종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다. 정갈하게 앉아 소리를 내는 모습은 차라리 제의에 가깝다. 오브제는 서로 마찰하며 갈리고, 때로는 그 가루가 자욱이 날린다. 제의를 집행하며 그간의 시간들을 쓰다듬는 진유영의 퍼포먼스는, 자신을 투영한 오브제들을 마찰하는 것을 넘어, 보다 직접적으로 자신의 몸을 쓰다듬는 것에 이른다. 손길은 하체로부터 상체로 이어져 연주자의 목에 남은 흔적에 다다른다. 목을 양손으로 쓰다듬는 행위. 오브제를 부수고, 목을 조르는 것이 아니라 쓰다듬는 행위로 이어지는 그 퍼포먼스는, 그 자신으로서도 낯선 변화임을 고백한다. 그는 의연하게 지나온 시간들과 현재의 자신을 쓰다듬는다.
2부. 관객에게 말걸기
1부가 그 자신의 과거를 더듬으며 진유영의 일기장에 주목했다면, 2부는 관객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비교적 선명해진다. 관객들은 2막에서는 보다 더 연주자의 의도와 관심사에 귀기울이게 되고, 들려오는 메세지를 통해 관객 자신의 경험을 반추하게 된다.
관객은 2막의 첫 공연으로 바로네즈라는 예술가를 만난다. 이 곡은 다다이즘 작가, 그 기여에 비해 덜 알려진 여성 예술가에게 바치는 헌사다. 진유영이 직접 밝혔듯 이 곡은 바로네즈의 기법을 차용한 오마주이자, 그의 현현이기도 하다. 오른팔을 현재의 순간에 불러들이는 초혼. 관객은 이 곡의 전체 구성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리값이라는 곡을 통해 관객은 가장 직접적으로 자신의 기억을 퍼올리는 작업에 착수한다. 연주자가 사물을 때리는 판은 관객의 일기장이 쓰여지는 판이 된다. 상자에서 정성스럽게 꺼내지는 사물들 하나하나는 그 하나하나가 일상적이고, 유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비눗방울, 딱풀, 성냥, 인형, 핸드폰, 스스로의 웹페이지에 자신을 냥덕이라고 소개하는 진유영이 손 위에 얹어 살짝 보여주는 고양이 장식. 물건들은 각자 소리를 내며 그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관객들의 과거가 불러와져 현재에 새겨진다. 이 퍼포먼스를 통해 연주자가 아꼈던 것, 관객 자신의 추억들이 하나하나 현재로 불러와진다. 기억을 불러와 현재에 새기는 그의 동작은 사뭇 종교적이다. 지나치게 세속적이고 일상적인 사물들 가운데 우스꽝스럽게 존재감을 나타내는 십자가도 그에 보탠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기억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사물들 하나하나를 정성스럽게 꺼내든 그는 다시 기억을 되감는다. 하나하나, 어지러이 풀어놓았던 기억들을 갈무리하듯. 이때 그는 첫 번째 함에서 기억들을 꺼내들 때의 정성스러운 손짓과는 상반되는 무성의해보이기까지 하는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옛 일기장을 꺼내어볼때 켜켜이 쌓인 먼지를 정성스레 쓸어낸다. 웃으며, 울며 낯선 과거의 자신을 미처 예비되지 않은 경건한 태도로 만난다. 그러나 그 기억을 갈무리하고 다시금 현재로 돌아올 때엔 홀가분하다. 기억은 다시 과거의 서랍으로 사라진다. 우리는 현재에 있다.
진유영은 안티 바다둠 철학에 대해 얇은 프로그램북에 담을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설명했다. 안티 바다둠은 이 공연 전체를 관통하는 미학이다. 공연의 마무리가 안티 바다둠을 정립한 작곡가의 곡으로 끝나는 구성은 무척 논리적이다. 관객은 이 곡을 통해 안티 바다둠이란 무엇인지 소개받는다. 바다둠, 바다둠. 단순히 치는 소리를 뜻하던 이 명제는 이제 안티 바다둠으로 새로이 의미화된다. 하나의 악기는 하나의 가장 완벽한 소리를 추구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타악기 철학을 비웃듯, 공기 중에서 진동하던 소리는 물속에 처넣어지고 전혀 새로운 소리를 빚는다. 거대한 수조 안의 소리와 공기중의 소리, 무엇 하나가 주된 소리를 자처하지 않는다. 악기들은 수조를 유영한다. 수조를 채운 물 진동으로 새로운 소리가 울려퍼진다. 공기 중에서도 하나의 방식으로만 소리내지지 않고, 익숙한 스틱은 뒤집힌 방향으로 북을 치고, 북의 사면이 두드려지고, 종은 공기중과 수중을 번갈아 널뛴다. 하나의 악기에 단 하나의 소리로 매칭된다는 전제는 산산이 부서진다. 같은 곳을 치더라도, 어떤 순간에 난 소리인가에 따라 같은 소리는 반복될 수 없다. 심지어 공연장의 배경음으로, 지나가는 기차 소리, 지하철 진동마저 섞인다. 하나의 악기가 낼 수 있는 소리는 무한대다. 연주자와 악기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있으며, 실현해낸다.
이방인’들’의 세계
관객들은 진유영의 내면을 마주하는 1막을 지나, 안내에 따라 관객 자신의 일기장을 채운다. 이방인의 일기장. 이방인이라는 단어에 깃든 쓸쓸함, 일기장이라는 단어에 깃든 내밀함,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읽힐 목적이 아닌 글인 일기, 그러나 언어의 형식이 필연적으로 내포하는 소통에의 바람. 그 감정들의 무게가 진득하게 밸 법도 한데 공연은 결코 비감에만 젖지 않는다. 공연 내내 이어지는 진유영의 위트는 주요한 관람 포인트다. 묵직하고 낯선 현대음악을 관객의 눈높이에 맞추어 재치있게 풀어낸다. 그 자신이 풀어내는 기억들 역시 결코 가볍지 않지만, 그럼에도 관객에게는 편안한 웃음을 유도해낸다. 이 역시 그의 능력이다.
우리 모두의 현재는 과거의 자신이 볼 때 이방인이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고, 단 한순간도 과거의 나와 동일한 존재로 존재할 수 없으나, 한 걸음 또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바람소리보다도 가볍게 나아간다. 살고싶은가봐. 덜 열린 성대를 가르는 쇳소리, 바람소리 섞인 그 목소리처럼. 진유영은 그 자신에게 묵직하게 버팀목이 되어준 시를 관객에게 선물한다. 관객들이 이곳에서 만난 지난날의 자신을 잘 갈무리하고, 또다시 무던하게, 살고싶다는 바람을 이어가기를. 그리하여 낯선 자신들을 계속 마주해가기를. 과거의 자신에게 이방인이 되는 현재의 나는 필연적으로 외롭겠지만, 그 주변을 돌아보면 나에게 또다른 시를 건네줄 수 있는 존재가 있음을 깨닫는다.